아시아태평양이라는 이름에는 수많은 항로가 교차하고 서로 다른 경제와 문화가 만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 내는 바다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올해 11월 중국 선전에서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역시 그런 바다 위의 중요한 이정표가 될 가능성이 있다.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지역 협력의 방향이 다시 시험대에 오른 지금, 아태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지가 주목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강조되고 있는 '아태 공동체 구축, 공동 번영 촉진'이라는 화두는 단순한 외교적 구호를 넘어, 공동의 미래를 향한 협력의 항로를 보다 구체적으로 그려 나가야 할 시점이 왔음을 보여준다.
아태 공동체라는 개념 자체는 결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오랫동안 역내 국가들은 무역과 산업, 공급망을 통해 긴밀하게 연결되어 왔으며 공동 번영이라는 이상 역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실제로 아태 지역은 세계 경제에서 가장 역동적인 성장 공간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아 왔다. 다양한 경제가 서로의 시장과 산업을 연결하면서 형성된 상호 의존 구조는 이미 하나의 거대한 경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공동체라는 개념은 때때로 선언 속 문장으로 남아 있기도 했다. 각국의 발전 단계와 경제 구조가 다르고 국제 환경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에서 공동체라는 이상은 공감의 언어로는 존재했지만 실제 협력 구조로까지 이어지기에는 여러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아태가 마주한 질문은 단순하다. 즉, 공동체의 필요성을 다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현실의 정책과 협력의 틀 속으로 옮길 것인가' 하는 문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가올 APEC 정상회의가 제시할 방향의 의미가 드러난다. 즉, 아태 공동체를 '목표에서 행동으로, 청사진에서 현실로' 옮기겠다는 것이다. 이는 공동체를 더 이상 이상적인 구호로 남겨 두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바다 위에 그려진 약속을 '실제 항로'로 바꾸겠다는 의미다. 항로가 만들어질 때 비로소 배는 방향을 얻고, 협력 역시 구체적인 움직임을 시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전환은 무엇보다 경제 협력의 기반에서 시작될 수 있다. 아태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교역과 투자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며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중국을 포함한 역내 주요 국가들이 장기간 추진해 온 개방과 협력의 노력은 아태 지역이 세계 경제에서 가장 역동적인 성장 공간으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무역과 산업 분업을 통해 이미 깊이 연결되어 있는 이 지역에서 자유로운 경제 협력의 틀을 더욱 발전시키는 일은 공동체 논의를 현실로 만드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서로의 시장이 더 넓게 연결되고 산업 협력이 확대될수록 공동체라는 개념 역시 추상적 이상이 아니라 실제 기회로 바뀐다.
혁신 또한 공동체를 움직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동력이다. 오늘날 아태 경제는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 스마트 산업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데이터와 기술이 새로운 경제 질서를 만들어 가는 시대에 혁신 협력은 단순한 기술 교류를 넘어 미래 성장의 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 디지털 경제와 지능화 기술을 중심으로 협력의 폭이 넓어질수록 아태 협력의 바다는 더욱 넓어질 것이다.
녹색 전환 역시 공동체를 현실로 만드는 중요한 영역 가운데 하나다. 기후 변화와 에너지 구조 전환은 어느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며 역내 국가들이 함께 대응해야 할 공동의 과제다. 친환경 산업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협력은 아태 지역이 공유해야 할 책임이자 동시에 새로운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공동체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공동 과제에 대한 협력 속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얻게 된다.
올해 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중국 선전이라는 도시가 지닌 상징성 또한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 선전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 경제 변화와 기술 혁신을 상징하는 도시로, 빠르게 성장하는 산업과 창의적인 기술 생태계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도시에서 열릴 이번 회의는 단순한 회의 장소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과거의 성과를 돌아보는 자리에 머무르기보다 앞으로의 연결과 전환을 설계하는 무대가 될 때 아태 협력은 다시 한 번 새로운 방향을 찾게 될 것이다.
공동체의 힘은 거창한 선언에서 나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체감할 수 있는 변화와 실질적인 협력 구조가 축적될 때 공동체는 비로소 현실이 된다. 바다는 수많은 물길이 만나야 넓어지듯, 아태의 미래 역시 다양한 국가와 경제가 함께 흐름을 만들어 갈 때 더욱 확장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태 공동체라는 오래된 약속이 이제 '실제 협력의 항로'로 이어질 수 있을지, 그 답을 찾는 과정이 바로 이번 APEC 정상회의가 가진 가장 중요한 의미일 것이다.
글: 김도영, 길림사범대학교 한국인 전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