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약진' 과 인민공사화 운동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Fecha de publicación:2022-07-12 | Publicado por:중국망

제1차 5개년 계획의 순조로운 시행과 3대개조의 완료로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인민의 신심이 배가하여 중국 부강 목표가 단기간 내에 이뤄질 것이라고 믿게 됐다. 중공중앙은 경제 전선과 사상 전선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위대한 승리를 거뒀고,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인민 대중의 열의가 고조됐으며, 경제를 보다 빨리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57년 겨울, 전국적으로 수리(水利)공사를 중심으로 한 동계 생산 열풍이 불어 '대약진(大躍進)'운동의 서막을 열었다.


1958년 5월, 중국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 제2차 회의가 개최되고 '의욕 고취, 목표 달성, 더 많이, 더 빨리, 더 좋게, 더 절약적으로 사회주의 건설하자(鼓足幹勁, 力爭上遊, 多快好省地建設社會主義)'는 총노선을 통과시켜 중국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모색하는데 새로운 국면을 열기를 도모했다. 회의 후 '대약진'운동이 전국적으로 빠르게 전개됐다.


'대약진'운동은 속도 맹신과 성과주의의 영향으로 농공업 생산과 건설 속도를 맹목적으로 추구했다. 공업에서 '대약진'은 우선 철강 생산량 기준을 계속 높여 대련강철(大煉鋼鐵, 철강을 대량으로 생산하다)운동이 일어났다. 농업에서는 농작물 생산량 평가가 심각하게 과장됐다. 1958년 여름 수확철 각지에서 농작물 생산량을 심하게 '과장'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높은 생산 지표와 과장하는 풍조는 생산관계를 소위 더 높은 급의 형태로 넘어가게 했다. 즉 사람들은 농업 합작사 규모가 클수록, 공유화 수준이 높을수록 생산이 촉진된다고 생각했다. 1958년 7-8월 동안 인민공사가 개별 지역에서 설립되기 시작했다. 연말까지 전국에서 인민공사화가 기본적으로 실현됐고, 74만개 농업사가 2만 6000개의 인민공사로 합병돼 전국 농가의 99% 이상이 포함됐다. 


'대약진'과 인민공사화 운동은 중국공산당이 중국  자신의 사회주의 노선 모색 과정에서의 심각한 과오이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객관적으로는 사회주의 건설의 험난함과 복잡함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인식이 부족했고, 당 전체가 대규모 경제 건설 경험이 보편적으로 부족했다. 주관적으로는 빈곤과 낙 후의 꼬리표를 빨리 떼고 아름다운 사회로 단숨에 진입하고 싶어하는 중국 인민의 열망이 간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