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조선반도(한반도)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미국 정부는 '유엔군'을 소집해 무장 간섭을 했고, 해군 제7함대를 파견해 중국 타이완(台灣)해협을 침입했다. 9월 15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10월 초, 미군은 중국 정부의 거듭한 경고를 무시하고 서슴없이 38선을 넘어 중국과 조선(북한) 국경까지 전쟁을 확대했다. 또한 여러 차례 전투기를 동원해 중국 동북 국경지역을 폭격해 신중국은 심각한 안보 위협을 받았다.
위기의 순간, 조선 당과 정부의 요청에 응해 중공중앙은 여러 차례 회의를 열어 심사숙고한 다음 10월 초순,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을 대항하고 조선을 돕다)와 국가 방위라는 역사적인 결정을 내렸다. 1950년 10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의 전쟁지역으로 출동하여 조선인민군과 긴밀하게 협조해 함께 싸웠다. 중국인민지원군의 해외 작전은 평화를 수호하고 침략에 반대하는 정의로운 행동이었다. 1951년 6월까지, 중·조 군대는 5차례 대규모 전투를 연속 벌여 미국을 필두로 한 '유엔군'을 압록강에서 38선 근처까지 몰아가 미국을 정전협상에 나서게 했다. 이후 협상과 전쟁이 2년 동안 반복되면서 이어졌다. 중·조 인민군대는 용맹하게 싸워 협상을 촉진했고, 1953년 7월 27일 미국이 정전협정에 사인하도록 했다. 2년 9개월 간의 피비어린 전투 끝에 중·조 양국 인민과 군대는 이 정의로운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
위대한 항미원조 전쟁은 제국주의의 침략 확장을 막았고, 신중국 안보를 수호했으며, 중국 인민의 평화로운 생활을 보호했고, 조선반도 정세를 안정시켰으며, 아시아와 세계 평화를 수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