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강 전투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Fecha de publicación:2022-07-13 | Publicado por:중국망

랴오선, 화이하이, 핑진 3대 전투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은 국민당은 정치, 경제, 군사에서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장제스는 시간을 벌고 재기를 노리기 위해 창장(長江) 천연 요새에 기대어 인민해방군의 도강(渡江) 남하를 막으려고 했다.


전쟁 조기 종결과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마오쩌둥은 국민당 정부에 평화 협상을 위한 8개 조건을 제시했고 이 때문에 인민해방군은 도강 남하 시간을 여러 차례 늦췄다. 난징 국민당 정부가 국공 양측이 이미 합의한 <국내평화협정 (國內和平協定)> 체결을 거절하자 마오쩌둥 중국 인민혁명 군사위원회 주석과 주더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은 1949 년 4월 21일 전국 진군 명령을 내렸다.


4월 20일 저녁에서 21일 저녁까지, 중국 인민해방군 제2, 제3 야전군이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도강 전투를 시작했다. 서쪽 후커우(湖口)에서 동쪽 장인(江陰)까지 천리 전선에서 인민해방군이 산도 허물고 바다도 메울 기세로 진격해 국민당의 육, 해, 공군으로 구성된 창장 방어선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4월 23일, 인민해방군은 난징을 점령하여 국민당 22년 반동 통치의 멸망을 선언했다. 4월 27일부터 5월 6일까지, 제3 야전군은 다시 랑시(郎溪), 광더(廣德)에서 난징과 전장(鎮江)에서 도망친 5개 군을 포위 섬멸하고, 5월 3일 저장성 성도인 항저우(杭州)를 점령했다. 이와 동시에 제2 야전군으로 구성된 서 집단군이 도강 후 남쪽으로 빠르게 진군 해 주장과 난창을 해방시켰고, 저간(浙贛, 저장-장시)철도를 끊어 탕언보(湯恩伯)와 바이충시(白崇禧) 집단군의 연결을 차단했다. 5월 17일, 우한 3진을 해방시켰다. 5월 27일, 상하이를 완전히 점령했다. 6월 2일, 충밍다오(崇明島)를 해방 시킴으로써 도강전투는 승리로 막을 내렸다.


42일 동안 진행된 도강전투는 인민해방군 사상자 6만여 명이라는 대가를 치렀지만 국민당 군대 43만여 명을 섬멸하였고 난징시, 상하이시, 우한시 등 대도시와 장쑤, 안후이 등 2개 성 전역과 저장, 장시, 후베이, 푸젠 등 일부 지역을 해방시켜 이후 화동 전역과 화남, 남서 지역 해방을 위한 진군에 중요한 조건을 마련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