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전쟁 승리 후 장제스는 20여개 사단을 집결시켜 중원 해방구를 포위 및 잠식하고 중원 해방군 부대를 섬멸해 화동, 화북, 동북으로 향하는 진군 노선을 열고자 했다. 1946년 1월, 국민당정부와 중국공산당 양측 대표가 정전협정을 체결했지만 국민당 군대는 여전히 병력을 증가하고 이동시켜 이 지역을 포위 및 공격했다. 6월 26일, 장제스는 국공 양측이 합의한 <정전협정>을 깨고 10개 정편사(整編師) 총 30여만 병력을 동원해 중원군구 부대를 우선 공격하도록 명령해 전면적인 내전이 발발했다.
중원군구는 중공중앙의 '즉각 포위 돌파, 신속 대응, 어떤 고려도 하지 말라, 생존 우선, 승리 우선' 지침에 따라 투쟁을 지속할 일부 지역 부대와 주력부대로 위장해 동쪽으로 이동시켜 국민당 군대를 교란할 1개 여단을 제외한 주력부대를 남북 두 갈래로 나누어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북로는 약 1만 5000명이 리셴녠(李先念) 중원군구 사령원, 정웨이싼(鄭位三) 정치위원, 왕전(王震) 부사령원의 인솔 아래 국민당 군대의 겹겹이 둘러싼 포위망을 뚫고 7월 하순 산난(陝南, 산시성 남부)지역으로 진입해 산난 유격대와 합류했고, 8월 초 어위산(鄂豫陝, 후베이·허난·산시 3성 접경지역)군구를 구축했다. 그중 왕전이 이끈 359여단은 계속 북진해 8월 말 산간닝 해방구에 진입했다.
남로는 약 1만여 명이 왕수성(王樹聲) 군구 부사령원의 인솔 아래 국민당 군대의 포위 추격 차단을 뚫고 어(鄂, 후베이성) 북서부의 우당(武當)산 지역으로 들어가 8월 하순에 어서북군구를 구축했다.
적군을 미혹시키고 견제하는 임무를 맡아 동쪽으로 이동한 제1종대 제1여단은 여단장 피딩쥔(皮定均)의 인솔 아래 적을 성공적으로 미혹시킨 뒤 포위망을 빠르게 돌파하고 동쪽으로 진군해 20여 일 동안 산 넘고 물 건너 천리 행군 끝에 쑤완(蘇皖, 장쑤(江蘇)성·안후이성)해방구에 진입했다. 중원 포위돌파는 해방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중원 포위돌파는 위대한 전략적 이동으로 국민당 군대 30개 여단 병력을 견제했고 주력부대를 보존했으며 두곳에 근거지를 세웠다. 또한 남은 소규모 병력은 있던 자리에서 투쟁하여 다른 전투장의 작전에 유력하게 협조하였고, 이후 전략적 반격과 해방전쟁의 전국적 승리를 탈취하는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 중공중앙과 중앙군사위원회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