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칭회담

(중국공산당 창당)

Fecha de publicación:2022-07-14 | Publicado por:중국망

피나는 노력으로 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중화 민족은 어떤 나라를 건설할 것인가 하는 고민에 직면했다. 중국공산당은 전국 가장 광범위한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해 평화로운 방법으로 독립적이고 민주적이며 부강한 신민주주의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지주와 대부르주아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 국민당 통치 집단은 항전 승리의 공로를 강탈하기 위해 내전 방식으로 인민이 이미 획득한 권리를 박탈하려고 했다.


국내적으로 항일전쟁 종결 직후라 평화적 요구가 대세여서 내전은 민심을 얻지 못했다. 국제적으로는 미국, 소련, 영국 3국도 중국의 내전을 찬성하지 않았다. 국내외 상황을 고려한 장제스는 내전을 적극 준비하는 동시에 중국공산당과 평화회담을 원한다고 밝혔다. 1945년 8월 중하순경에, 장제스는 3차례 전보를 보내 마오쩌둥을 충칭(重慶)으로 초청해 '국내외 각종 중요 사안'을 논의하자고 했다.


중국공산당은 당시 국내외 정세와 국민당의 내전 음모를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고, 정세를 유리하게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해 우선 오랜 전란으로 안정을 바라는 인민의 강력한 바람을 반영하고 평화로운 방법을 통해 중국의 발전을 쟁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동시에 회담을 통해 겉으로는 평화를 외치지만 실은 내전을 바라는 국민당의 속내를 밝혀 대응 준비할 시간을 벌기로 했다. 중공중앙은 연구를 거듭해 평화, 민주, 단결의 3대 정치 구호를 제시하기로 결정했다. 마오쩌둥은 초청을 수락하고 충칭을 방문해 회담에 나섰다. 이와 동시에 인민군대는 방어전쟁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1945년 8월 29일,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왕뤄페이(王若飛)는 국민당 당국과 회담을 시작했다. 43일 간의 회담 끝에 국공 양측 대표는 10월 10일 회담 의정서인 <쌍십협정(雙十協定)> 을 체결했다. 국민당 당국은 '평화 건국의 기본 방침'을 인정하고 '장기간 협력, 내전 결사 회피,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부강한 신중국 건설'과 정치협상회의 개최 등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양측은 인민군대와 해방구 정권이라는 2개 근본 문제에는 합의하지 못했다. <쌍십협정>은 국공 양당이 협상 방식으로 도출한 공식 문건으로 협정 체결로 전면적인 내전이 연기돼 전후 국내 평화 발전의 희망을 주었다.


충칭회담과 <쌍십협정> 체결은 국민당 측이 중국공산당의 지위와 각 당파의 회의를 인정해 평화롭게 신중국을 건설하자는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주장을 전국 인민이 이해하도록 만들었고, 민주 통일전선 형성을 촉진했으며, 전국 평화 민주 운동을 추진했고, 국공 양당 관계 발전에도 귀중한 역사적 경험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