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민족 통일전선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Fecha de publicación:2022-07-14 | Publicado por:중국망

9·18사변, 특히 화북사변 이후 중국의 국제 관계와 국내 계급 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다. 중·일 민족간 모순이 중국 사회의 주요 모순으로 격상됐다. 중화 민족이 직면한 주요 문제는 일본의 침략에 저항해 날로 심각해지는 민족의 위기를 타개하는 것이었다. 중국공산당은 민족의 대의에 입각해 민족을 구하는 역사적 중임을 지고 국공합작을 기반으로 하는 항일 민족 통일전선을 구축하자고 호소했다.


1931년 9·18사변 이후 중국공산당은 선언을 발표해 일본 침략에 목숨 걸고 저항해 국가 주권과 완전한 영토 수호의 결심을 보여주었다. 중국공산당은 항일을 주장한 국민혁명군 제19로군과 장제스를 반대하고 항일하는 반장항일(反蔣抗日) 협정을 체결하고, 차하얼(察哈爾) 항일동맹군의 구성에 가담했다. 또한 동북지역에서 항일 공동 전선 전략을 시험 운용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해 광활한 동북지역을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 무장 세력이 직접 일본과 작전을 펼치는 첫 번째 전장으로 만들었다.


1935년, 화북사변 이후 중국공산당은 <항일 구국을 위해 전체 동포에게 고하는 글>(<8·1선언>)을 발표하고 12·9애국 항일운동을 일으켰으며, 12월 소집된 와야오바오회의에서 당의 기본 전략과 임무는 광범위한 항일 민족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명시했다. 1936년 중공중앙은 정책을 계속 조정해 '반장항일'에서 장제스를 항일토록 압박하는 '핍장항일'로 다시 장제스와 연합하여 항일하는 '연장항일'로 정책을 조정했고 시안사변의 평화로운 해결을 촉진해 국공 내전 종료를 선언했다. 같은 기간 중국공산당은 국민당 애국 군대와 기타 항일 무장 세력과 합동 항전을 펼쳐 중국과 세계 범위에서 반 파시즘전쟁을 앞장서 진행한 정당이 됐다.


1937년 2월, 중공중앙은 국민당 제5기 중앙집행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 양대 정당과 두 정권간의 대립을 해소하고 국공합작을 이뤄 함께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자는 취지의 '5항 요구(五項要求)'와 '4항 보장(四項保證)'을 제시했다. 일본 침략군의 계속된 압박과 전국 인민의 항일 구국 물결 속에서 국민당은 어쩔 수 없이 국공합작 항일이라는 올바른 주장을 받아들였다. 같은 해 9월, 국민당 중앙통신사는 <중공중앙이 국공합작 공표를 위한 선언>를 발표했다. 이는 장제스가 사실상 중국공산당의 합법적인 지위를 인정한다는 것이고, 제2차 국공합작을 기반으로 한 항일 민족 통일전선이 공식 형성됐다는 것을 뜻한다. 전국 각 민족 인민, 각 진보당파, 항일단체와 사회 각계 각층의 애국인사, 해외 교포는 국공 양당의 재협력을 열렬하게 환영했고 다양한 형태로 항일 민족 통일전선에 참여했다. 중화 민족의 대단결은 전면적인 항일전쟁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항일 민족 통일전선의 깃발 아래 중국공산당은 일본 제국 주의 침략에 저항하는 중추 세력이 됐고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인민 혁명 역량은 항일전쟁 과정에서 강력해져 중국의 정치 앞날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역량이 됐다. 민족 전체의 항전은 중국 인민이 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중요한 비결이기도 하다.


장장 14년 간의 지극히 힘들고 어려운 항전 끝에 중국 인민은 일본 침략자를 물리쳤고, 일본 군국주의는 철저한 실패를 고했으며, 중국 인민의 항일전쟁과 세계 반 파시즘전쟁의 최후 승리를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