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국공합작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Fecha de publicación:2022-07-14 | Publicado por:중국망

제2차 국공합작은 항전을 배경으로 점차 형성된 것이다. 1935년 8월 1일, 중국공산당 주 코민테른 대표단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 중앙정부와 중공중앙 명의로 <항일 구국을 위해 전체 동포에게 고하는 글>, 즉 <8·1선언>을 발표했다. <8·1선언>은 전국 인민이 단결해 내전을 중단하고 항일 구국에 나서며 국방 정부와 항일 연합군을 구성하자고 호소했다. 12월, 중공중앙은 와야오바오(瓦窯堡)회의에서 항일 민족 통일전선의 전략 방침을 확정했다.


1936년 8, 9월 사이, 중공중앙은 국민당에게 보내는 서신(致國民黨書)과 <장제스를 항일하도록 압박하는 문제에 관한 지시(關於逼蔣抗日問題的指示)>를 발표하고 양당의 재 협력을 제창했다. 12월, 시안사변이 발발하자 중국공산당은 재빨리 평화로운 해결 방침을 확정하고 저우언라이 등 인사를 시안으로 파견해 협상에 나섰다. 각고의 노력 끝에 사변은 평화롭게 마무리됐고 국공 제2차 협력의 전제 조건이 마련됐다.


1937년 2월에서 9월 하순까지, 국공 양당 대표가 6차례 협상을 진행한 끝에 국민당이 마침내 중국 노농홍군을 국민 혁명군 제팔로군으로 개편하는 것에 동의하고 산간닝(陝甘寧, 산시 북부·간쑤 동부·닝샤 일부 지역) 변구(邊區) 정부를 인정한다고 선언했다. 9월 22일, 국민당 중앙통신사는 <중공중앙이 국공합작 공표를 위한 선언>을 발표했다. 23일, 장제스는 담화를 발표하여 외부 침략에 항거하기 위해 단결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사실상 중국공산당의 합법적인 지위 를 인정했다. 장제스를 반대하면서 항일하는 '반장 항일(反蔣抗日)'부터, 장제스를 항일하도록 압박하는 '핍장 항일(逼蔣抗日)'그리고 장제스와 연합하여 항일하는 '연장 항일(聯蔣抗日)'까지 6개월여의 우여곡절 끝에 어려운 협상을 거쳐 중공중앙 <중공중앙이 국공합작 공표를 위한 선언>과 장제스의 <중국공산당 선언에 대한 담화> 발표를 기회로 국공 양당의 제2차 합작이 공식화됐다.


1937년 9월에서 1939년 1월까지, 제2차 국공합작의 고조시기였다. 이 기간 국민당은 비교적 열심히 항전에 나섰고 국공 양당 관계도 비교적 좋았으며 전국이 단결해 항전하는 새로운 국면이 전개됐다. 1939년 7월에서 1943년 9월까지, 국민당 정책의 중심이 대외에서 대내로 옮겨지면서 3차례 반공 고조가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합리적이고 유리하고 절도있는 투쟁을 진행해 합작을 유지했다.


1943년 9월에서 1945년 8월까지, 국공 양당은 연합정부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투쟁했다. 1945년 8월에서 1947년 2월까지는 제2차 국공합작이 점차 파열된 시기다.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의 내전 정책을 단호하게 반대하고 독립, 자유, 민주, 통일, 부강한 신 중국을 수립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민당 반동파는 내전을 고집했고 정전협정을 파기해 제2차 국공합작이 철저하게 박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