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사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

Fecha de publicación:2022-07-14 | Publicado por:중국망

1936년 12월 12일, 국민당 애국 장교 장쉐량(張學良)과 양후청(楊虎城)이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서 '병간(兵諫)' 즉 무력을 써서 간언을 하여 장제스에게 항일 투쟁을 전개하도록 압박했다. 이를 시안사변, 또는 '쌍12사변(雙十二事變)'이라고 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이 심해지자 1935년 중국공산당은 <항일 구국을 위해 전체 동포에게 고하는 글(爲抗日救國告全體同胞書)> 즉 <8·1선언(八一宣言)>을 발표하고 항일 민족 통일전선을 제시했다. 전국 인민의 항일운동이 새로운 고조에 달했고 장제스의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 밖을 막으려면 안을 먼저 안정시켜야 한다)'는 정책은 민심의 외면을 당하였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내전을 중단하고 함께 항일운동에 나서자고 여러 차례 충고했지만 거절당했다.


1936년 12월 초, 시안에 도착한 장제스는 장쉐량과 양후청에게 즉시 부대를 이끌고 산베이(陝北, 산시성 북부) 전선으로 가 '공산당을 토벌'할 것을 압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장쉐량과 양후청은 '병간'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12월 12일 새벽, 동북군과 제17로군이 합동해 장제스를 구금하고 천청(陳誠)과 웨이리황(衛立煌) 등 국민당 군정 주요인사 수십 명을 감금한 다음, 즉시 전국에 이 소식을 알려 난징정부 개편, 일체의 내전 중단 등 8개 항일 주장을 제시했다. 이것이 국내외를 놀라게 한 시안사변이다.


중국공산당은 사변 전 이 사실을 몰랐다. 사변 발생 이후 장쉐량은 당일 밤 중공중앙에 중앙의 의견을 듣고 싶다는 전보를 보냈다. 중공중앙은 국내외 상황을 분석하고 중화 민족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평화로운 방식으로 사변을 해결한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12월 17일, 저우언라이를 필두로 한 중국공산당 대표단이 시안에 도착해 시안사변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장쉐량, 양후청과 회담을 갖고 각계 인사를 회견했다. 저우언라이와 장쉐량, 양후청의 공동 노력으로 협상을 거쳐 장제스에게 '공산당 토벌을 중단하고 홍군과 연합해 항일투쟁을 전개한다'는 6개 항목의 약속을 받아냈다.


시안사변은 국민당과 공산당 협력 재개의 객관적인 상황이 무르익어갈 때 협력을 성사시키는 역할을 했다. 시안사변의 평화로운 해결은 시국의 전환점이 됐다. 이로써 중국의 10년 내전이 끝나고 국내 전쟁에서 전국 항전의 위대한 전환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