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9월 18일 밤, 불평등조약으로 중국 동북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은 장기간의 모의와계획 끝에 선양(沈陽)시 북쪽 류탸오(柳條)호 근처의 남만(南滿)철도 한 구간을 폭파하고 중국 수비군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이를 빌미로 동북군 주둔지인 베이다잉(北大營)과 선양성을 기습 공격했다. 선양을 점령한 뒤 며칠 만에 20여 개 도시와 주변 지역을 점령했다. 이것이 바로 국내외를 놀라게 한 9·18사변이다. 일본군 침략 앞에서 국민당 정부는 민족의 위기를 고려하지 않고 반공, 반인민 내전에 역량을 집중한 채 일본군에게는 절대적인 무저항정책을 취해 동북군을 산하이관(山海關) 안으로 철수 시켰다. 선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곧바로 지린(吉林)과 헤이 룽장(黑龍江)을 침략했다. 1932년 2월, 동북 3성이 전부 함락됐다.
9·18사변은 일본 정부가 오랫동안 추진한 대 중국 침략 확장 정책의 필연적인 결과로 중국을 일본의 독점 식민지로 삼기 위해 취한 중요한 단계였다. 9·18사변 이후 중화 민족이 최고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게 전국 각 민족, 인민, 각계 인사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중국에서 몰아내는 것이 중국 인민의 염원이었다. 각지의 인민이 항일을 요구하고 나서며 국민당 정권의 '무저항' 정책에 반대했다.
민족의 위기가 날로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은 항일의 기치를 계속 들었다. 중국공산당의 영도와 영향으로 동북 인민들이 저항에 나서 항일 유격전을 펼쳤고 동북 항일의용군 등 다양한 항일 무장세력들이 나타났다. 1936년 2월, 동북의 각 항일부대가 동북항일연합군으로 통합됐다.
1937년 루거우차오(盧溝橋, 노구교)사변 이후 항일연합군은 군중과 함께 보다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해 중국공산당이 전국에서 이끄는 항전에 적극 협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