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대혁명 실패 이후 중국의 혁명은 침체기에 진입했다. 대혁명 실패 경험과 교훈을 되새기고, 과거 업무 중 당의 심각한 잘못을 청산하고 시정하며, 새로운 투쟁 방침과 임무를 확정하기 위해 코민테른 지시와 당내 동지들의 요구에 따라 중공중앙은 1927년 8월 7일 한커우에서 비밀리에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이를 8·7회의라고 한다.
회의는 취추바이, 장타이레이(張太雷), 리웨이한(李維漢)과 코민테른 대표가 함께 준비하고 취추바이가 주재했다. 회의에서는 대혁명 실패 경험과 교훈을 정리하고 국공 양당 관계, 토지개혁, 무장 투쟁 등 문제에 관해 토론했다. 마오쩌둥은 회의 발언에서 천두슈의 우경화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국민당 문제에서 중공중앙은 국공합작 과정에서 '주인'의식이 없었고 농민 문제에서 중공중앙은 농민혁명을 지원하지 않았으며 군사 문제에서 중공중앙은 '군사운동을 하지 않고 민중운동만 했다'고 지적했다. 마오쩌둥은 '추수폭동은 군사를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며 당은 '앞으로 군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겨야 하고, 정권은 총구를 통해 얻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의에서 대혁명 후반부에 나타났던 천두슈의 우경화 기회주의 잘못을 철저하게 청산하고, 토지 혁명과 무장봉기 방침을 확정했으며, 취추바이를 필두로 하는 중공중앙 임시정치국을 선출했다.
8·7회의는 중국공산당 역사에서 중요한 회의로 당을 구하고 혁명을 일으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대혁명 실패에서 토지혁명전쟁 발발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커다란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