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장제스와 왕징웨이가 반혁명 정변을 일으켜 국공 합작으로 혁명을 이끄는 형태는 막을 내렸다. 전국적으로 혁명적 형세가 급변해 중국공산당은 유혈 진압 앞에서 독자적으로 토지혁명을 이끌고, 새로운 혁명 노선을 모색해야 하는 험난한 노정이 시작되었다. 전멸 위기의 순간, 1927년 7월 중순, 중공중앙정치국 임시상무위원회는 당이 장악했거나 당의 영향력 하에 있는 부대를 난창으로 집중시켜 무장봉기를 준비시켰고, 노농운동 기반이 튼튼한 후난(湖南), 후베이, 장시, 광둥 4개 성에서 추수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1927년 7월 27일,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이 난창에 도착해 당일 전선위원회(이하 '전위')를 구성하고 봉기에 필요한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8월 1일, 저우언라이를 서기로 한 전위와 허룽(賀龍), 예팅, 주더(朱德), 류보청(劉伯承) 등이 중국공산당이 장악했거나 당의 영향 아래에 있는 2만여 명의 북벌군대를 이끌고 난창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4시간여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봉기군은 적 3000여 명을 사살하고 난창을 점령했다. 난창봉기 이후 왕징웨이는 장파쿠이(張發奎), 주페 이더(朱培德)에게 긴급히 난창 진격을 명령했다. 전위는 중공 중앙의 원래 계획에 따라 의용군을 이끌고 광둥으로 진군해 광둥을 근거지로 삼고 다시 북벌을 계획하였다. 8월 3일-6 일, 봉기군은 차례로 난창에서 철수했다. 10월 초, 봉기군은 남하 도중 패배했다. 남은 무장부대 일부가 하이루펑(海陸豐) 지역으로 옮겨 투쟁을 계속했다. 일부는 주더와 천이(陳毅)의 인솔 아래 이곳저곳을 전전한 끝에 1928년 4월, 징강산(井岡山) 혁명 근거지에 도착해 마오쩌둥이 이끄는 샹간(湘贛, 후난성·장시성) 접경 추수봉기 부대와 합류했다.
난창봉기는 국민당 반동파에 무력으로 항거하겠다는 신호탄을 쐈고, 혁명을 끝까지 하겠다는 중국공산당의 결연한 입장과 굳건한 결심을 보여주었으며, 중국공산당이 독립적으로 혁명전쟁을 이끌고 인민군대를 창설해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것을 상징하였다. 이로써 인민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진정한 군대가 탄생했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절대적 인지도 아래 혁명 정치 임무를 충실하게 집행하는 무장 세력이며 인민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 복무하는 인민 무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