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전쟁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Fecha de publicación:2022-07-14 | Publicado por:중국망

제1차 국공합작 이후 1926년 2월, 중공중앙은 현재 당의 주요 임무는 광둥(廣東) 혁명 세력을 북으로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1926년 여름, 국공 양당은 북벌전쟁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직접적인 타깃은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는 북양군벌 우페이푸, 쑨촨팡(孫傳芳), 장쭤린(張作霖) 등 3개 세력이었다. 7월 9일, 광둥 국민정부가 이끄는 국민혁명군 10만 명이 북벌에 나섰다. 북벌군은 각계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용맹하게 전진해 10월 10일 후베이(湖北)성 우창(武昌)을 점령하고 군벌 우페이푸의 주력군을 전멸시켰다. 11월에는 장시(江西)성 주장(九江)과 난창(南昌)을 점령하고 군벌 쑨촨팡의 주력군을 섬멸했다. 푸젠(福建)성과 저장(浙江)성 등의 군벌도 북벌군에 속속 넘어갔다.


북벌전쟁은 중국공산당이 제시한 반제반봉건 군벌 구호 아래 진행됐다. 북벌 과정에서 중국공산당 당원은 군대, 정치 작업, 노동자와 농민 군중을 이끄는 분야에서 큰 기여를 했다. 공산당원 예팅(葉挺)이 이끌고 공산당원을 주축으로 구성된 제4군독립단은 ‘철군’이라는 호칭을 얻은 제4군 중에서도 용감하고 전투에 능한 선봉부대가 됐고, 예팅도 북벌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북벌군이 전진하는 중요한 순간에 장제스와 왕징웨이 등 국민당 우파세력이 상하이와 우한에서 반혁명 정변을 일으켰다. 이와 동시에 천두슈의 잘못된 우경 기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중국공산당은 돌발 사건에 대해 제때 정확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그 결과, 장제스의 반동집단이 혁명의 성과를 가로챘고 새로운 군벌통치를 구축해 기세 높은 북벌전쟁이 실패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