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국공합작이 성사된 이후 중국공산당은 전국 노동자와 군중 운동을 계속 이끌었다. 1925년 5월 1일, 중화전국총공회가 광저우에서 공식 설립됐고, 공산당원 린웨이민(林偉民), 류사오치(劉少奇)가 각각 정·부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5월 15일, 상하이 내외면제7방직공장의 일본인 오너가 노동자 대표이자 공산당원인 구정훙(顧正紅)을 살해하고 노동자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중공중앙은 조계지 내에서 대규모 반제국주의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5월 30일, 상하이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거리 선전과 시위 행진을 하였다. 조계지의 영국 경찰이 난징(南京)로에서 갑자기 군중에게 발포해 13명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이 사건이 바로 전국을 뒤흔든 5·30참사이었다. 며칠 뒤, 상하이와 다른 지역에서 영국과 일본 등 국가의 군경이 중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계속 발생했다.
이들 사건으로 전국 인민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중공중앙은 취추바이, 차이허썬, 리리싼, 류사오치, 류화(劉華) 등으로 행동위원회를 구성하고 상하이 노동자 파업, 학생 동맹 휴학, 상인 영업 중단의 항의 활동을 조직했다. 중국공산당의 영도와 추진으로 5·30운동은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됐고 약 1700만 명이 운동에 직접 참가해 전국적인 규모의 반제국주의 기세와 국제 영향력을 지닌 반제 투쟁 분위기를 형성했다.
5·30운동은 중국공산당의 전국적인 영향력을 확대해 당원 수가 1년 만에 10배 증가하게 됐다. 이 운동은 16개월 동안 25만 명이 참가한 성항(省港, 광저우와 홍콩) 대파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대혁명이 고조에 이르는데 중요한 추진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