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국공합작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Fecha de publicación:2022-07-14 | Publicado por:중국망

1923년 6월 소집된 중국공산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전술 원칙과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중국 혁명의 구체적인 상황과 결합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중국 사회의 모순을 분석했으며, 중국 혁명의 성격을 분명히 했다. 이를 기반으로 창당 초기 당내에 존재하는 국공합작에 관한 중대 이견을 정확하게 해결하고, 당 전체의 인식을 통합했으며, 공산당 당원이 개인 신분으로 국민당에 가입해 국민당과 당내 협력하는 전략 방침을 정식 확정했다. 이로써 연합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반(反)제반 (反)봉건의 민주혁명 임무를 함께 완수하도록 했다.


1924년 1월 20일-30일, 중국공산당의 추진으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광저우(廣州)에서 개최됐고, 쑨중산(孫中山)이 대회를 주재했다. 대표 165명이 대회에 참석했다. 그 중 공산당 당원은 20여 명으로 리다자오, 탄핑산(譚平山), 린보취(林伯渠), 장궈타오, 취추바이(瞿秋白), 마오쩌둥, 리리싼(李立三) 등이 포함되었다. 대회에서는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선언(中國國民黨第一次全國代表大會宣言)>을 심의 통과시켰고,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관 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으며 '연소(聯蘇), 용공(容共), 농공 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을 골자로 한 '신삼민주의'를 제시했다. '신삼민주의' 강령은 중국공산당의 민주혁명 단계의 강령과 기본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에 제1차 국공합작의 정치 기반이 됐다. 대회는 조직 노선 면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관계를 정립했다. 즉, 공산당원과 사회주의 청년단원이 개인 신분으로 국민당에 입당할 수 있도록 했다.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개최는 제1차 국공(국민당과 공산당)합작이 공식적으로 형성되었음을 시사하였다. 이는 젊은 중국공산당이 민주혁명 강령과 민주 연합전선 정책의 실천으로 이룬 중대한 승리이며, 쑨중산 말년에 중국 혁명을 추진함에 있어서 거둔 역사적인 공적이다. 국공합작은 국공 양당이 제국주의와 봉건 군벌에 반대한다는 입장이 맞물리고 양당 각자의 발전에 필요한 것이었다.


제1차 국공합작 이후 중국공산당의 노력과 추진으로 중국 혁명은 제1차 고조를 일으켰고, 노농(工農, 노동자와 농민)운동의 회복 및 발전을 촉진했으며, 반제반봉건 혁명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1926년 말부터 1927년 초까지 북벌군은 승리적으로 진군해 중국 대부분을 휩쓸었고 전국적으로 반제 애국주의 정서가 갈수록 높아졌다. 상하이 노동자 3차 무장봉기와 농민운동으로 국민 혁명이 한층 고조됐다. 하지만 혁명이 고조에 달하면서 통일전선 내부의 영도권 쟁탈이 날로 치열해졌다. 1925년 3월, 쑨중산이 세상을 떠나자 영도권을 찬탈하려는 국민당 우파의 움직임이 거세졌다. 장제스(蔣介石)를 필두로 하는 신 우파와 신 군벌 세력이 반혁명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1927년 4월, 장제스는 상하이에 서 4·12 반혁명정변으로 대표되는 '청당운동(清黨運動)'을 전개했다. 7월 15일, 왕징웨이(汪精衛) 집단이 우한에서 공 산당원과 혁명 군중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학살했다. 이로써 국공 양당이 합작해 진행한 대혁명은 실패를 고했고, 3년 6개월 동안 지속된 제1차 국공합작은 파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