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남[Chi-nan,济南,지난 ]
중국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도시이며 성도(省都).
지구급(地區及) 시이며, 산둥 군관구(軍官區)의 사령부가 있다. 타이산 산맥[泰山山脈]의 북쪽 기슭에 있으며, 황허 강[黃河] 바로 남쪽의 고지대 위에 있다. 황허 강은 산둥 구릉지대의 북쪽면을 따라 지난의 주요수로가 되고 있다.
천연 수원지들로부터 솟아나는 물이 풍부하여 일찍부터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해 살았다. BC 8세기부터 제(齊)나라의 주요도시였던 역하(歷下)가 자리했던 곳으로 주대(周代:BC 1111경~221)에 번영을 누렸다. 그뒤 BC 2세기에 이곳은 지난 군(郡)에 속한 리청 현[歷城縣]의 현청소재지가 되었다. 도시의 이름은 당시에 지금의 황허 강 하류 노선을 따라 흐르던 '제강(濟江)의 남쪽'이라는 뜻에서 유래한다. 제강의 군청소재지가 현재의 도시로 옮겨온 것은 4세기초이다. 그뒤 2세기 동안 수차례 이름이 바뀌면서도 행정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은 유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주요 종교 중심지가 되었는데,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타이산 산(지금은 위황딩 산[玉皇頂山]으로 부름)은 중국에서 가장 성스러운 산의 하나이다. 더구나 4~7세기에 많은 불교 동굴사찰이 지난 남쪽의 구릉지대에 세워졌다. 수·당대(隋唐代:581~907)에는 지난 군이라는 이름의 대도시였다. 1116년 부(府)가 된 이래 1911년까지 부의 지위를 유지했다. 13세기에 중국을 여행했던 베네치아인 마르코 폴로가 이 마을을 다녀간 적이 있는데 칭리(Chingli)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대해 기술했다. 명대(明代:1368~1644)에 산둥 성이 생기면서 지난은 성도가 되었다. 1911년에는 옛 이름을 따 리청 현이 되었다. 그러나 1930년 옛 도시와 1906년 이후에 개발된 근대적 상업지역 및 리커우[歷口] 북부 근교지역을 병합해 시가 되었다.
1852년 황허 강이 지난 바로 북쪽에 있는 옛 제강의 하상으로 물길을 바꾸면서 지난도 근대적 성장을 이룩하기 시작했다. 황허 강이 비록 주요수로는 아니었지만 물길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소형 선박을 이용해 대운하 및 산둥 성 북부와 허베이 성[河北省] 남부의 수로들과도 연결되었다. 지난에서 황허 강 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가는 샤오칭 강[小淸河] 역시 소형 선박들의 수로로 이용되었다. 1904년 대외무역에 개방된 칭다오[靑島]에서 시작된 철도 공사가 독일에 의해 완공되면서 이곳은 교통 중심지로서 매우 중요해졌다. 1912년 톈진[天津]에서 푸커우[浦口]까지의 남북간 철도가 완공되면서 지난은 철도교차지가 되었다. 그러자 지난은 북쪽의 비옥한 농업지대에서 나는 농산물의 집산지이자 주요 상업 중심지로 빠르게 변해갔다. 면화·곡물·땅콩·담배 시장이 크게 형성되었고, 직물·제조·제분·착유 공장 및 제지·시멘트·성냥 공장이 들어서 산둥에서는 칭다오 다음가는 공업 중심지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 대신 일본이 산둥 성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꽤 큰 규모의 일본인 거주구역이 지난에 세워졌다. 국부군의 북벌(北伐) 기간인 1928년 일본군은 자기 나라의 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지난 사변으로 알려지게 된 사건에 개입했다. 상당한 규모의 병기고가 이곳에 세워졌고, 이로 인해 지난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내내 경쟁세력 사이의 분쟁 대상이 되었다. 1937~45년에는 일본에 점령되었다.
지난이 중국공산당 세력에 넘어간 것은 1948년이다. 당시 지난은 주요 행정 및 산업 중심지로 빠르게 성장했다. 이전에 세워진 직물공장과 제분공장이 확장되었으며, 중요한 기계·건축 공장이 들어섰다. 1970년대초 대형 트럭과 땅 고르는 기계 등이 제작되는 자동차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1950년대말에는 철강공업이 들어서 선철·금속주괴·가공철이 생산된다. 지난은 산둥의 주요 문화 중심지이기도 하다. 농업·의학·공과 대학과 규모가 큰 종합대학이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지가 많이 있다. 주변지역에는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한 곳이 많다. 인구 1,480,915(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