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중국 사람들 춘제 보낸 모습
60년대 춘제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잊을 수없는 달콤한 기억이다.쌀밥이라곤 구경도 못하고 고기 비린내도 조차 맡아 볼 수 없었던 그 시절,섣달 그믐이나 되서야 박력분으로 고기만두를 빚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또한 평소에 용돈 한푼 없다가 이날 세뱃돈을 받으면바람개비도 사고 종이등을 만드는 등 이날은 아이어른 할 것없이 모두 즐거운 날로 기억되었다.
집단주의는60대 춘제의 특징이었다.각 사업체에서 단체영화표를 배포하고 공연을 준비하며 단체로 새해인사를 다녔다.또한 동사무소에서는일괄적으로 식량배급표와 물품구매수첩을 배포하고 대청소를 실시했다.그당시 주민들이 차린 음식들은 비슷비슷했고각자 집 꾸민 모양새도 유사했다.사람들의 복장이나 액서서리도 유사했고 생활에 대한 바램도 비숫했다.
춘제는 언제나 아이들에게 가장 즐거운명절이다.춘제가 오기 전에 어머니들은아무리 바빠도,아무리 손재주가 없어도 일년동안 모아둔 옷감배급표로 빨간색과 파란색의 코듀로이천을 떠다 늦은 밤까지 재봉질에 한창이었다.설날아침 아이들은 머릿맡에잘 개어져 놓인 설빔을 발견할 수 있었다.그때는 집안의 첫째아이가 입다 작아진 옷을 둘째아이에게 물려주던 시절이었다.하지만 춘제에는 아무리가난한 집이라도 헌옷을 수선해서라도 아이들에게 설빔을 마련해 줬다.
“아버지동지,어머니동지,새해 복많이 받으세요!”제야의 종소리가 울릴때 직장에 다니는 자녀들은 부모에게 이와 같이 새해 인사를 올렸다.두손을 모아 위아래로 흔드는 공수경례법과“부자되세요!”라는 식의 덕담은 더이상 유행하지 않았다.서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새해 복많이 받으세요!”나“춘절 축하합니다”라고 말했다.아이들이 어른에게 했던 세배도 이미 구식이 되어 버렸다.사람들은 보통 케익과 과자를 건네거나 개량된 연화(年画)를 선물하기도 했다.
적잖은 사업체에서 정월 초이틀에 단체 새해인사에나서는데 보통 동료들이 함께 모여 앉아 다과회를 가졌다.지도자들은“미신을 퇴치하고 과학적 사고를 해야 한다,낭비를 조장하지 말고 검소해야 한다,쓸데없이 여기저기 배회하지 말고 건전한 문예오락활동에 참여해야 한다,출근전에 음주하지 말아야 하고 생산업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로 대표되는‘4요4불요(四要四不要)’를 제창했고 사람들은 회의가 끝난 뒤 테이블 위에 차려진 땅콩이나 해바라기씨를 손수건에 싸서 아이들에게 가져다 줄 수 있었다.
70년대 전반기의 춘제놀이문화는 비교적 단조로웠다.혁명모범극,혁명가곡,혁명뮤지컬,혁명영화,다큐멘터리등은 십년을하루같이 지속해 왔다.1977년 국내상황이 크게 변하면서 춘제도 생기를 되찾았고 체육공연,묘회,무도회,시 낭독회,문예의 밤,음악회가 열렸으며 심지어 내부영화까지도 상영되곤 했다.춘제 문화 공연들도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70대 후기 각종 모자를 썼던 사람들이 모자를 벗기시작했고 한동안 두려움으로 교제를 끊었던 지인들을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남색과 초록색 군복차림에서 나팔바지와 양복까지,혁명모범극과 혁명가곡에서<향연(鄕戀)>등 유행가요까지,영화<상감령(上甘岭)>과<창업>에서 일본영화<추격>과 프랑스영화<노트르담 드 파리>까지, “도시고 농촌이고 다교육을 받아야 한다”에서“대학입학고사 부활”까지, ‘미제’에서‘중미수교’까지, ‘문화대혁명’에서 개혁개방까지,이 시대에 만연했던 구속된 생활패턴이 순식간에 엄청난 변화를 겪으면서 사람들은 격동의 세월을 보냈다.
출처:中国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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