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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한국인들, 물가상승으로 생활 힘들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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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china.org.cn | 时间: 2012-09-04 11:33:57

빠른 경제성장이 가져다 주는 기회, 그리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생활비용 때문에 베이징에서는 많은 한국사람들이 생활하며 자신들의 미래를 꾸려나가고 있다. 그런데 베이징의 물가가 점점 높아지고 2008년 경제위기의 여파로 베이징에서 생활하는 많은 한국인들은 한국인들이 밀집해서 살아가고 있는 “왕징(望京)에서 살기가 쉽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

왕징에서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이한춘 씨는 1999년 회사에서 파견을 나와 베이징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는데 회사가 문을 닫자 실직을 했고, 가족들과 함께 베이징에서 5년간 생활했을 때 여건이 여의치 않아 아내와 딸은 한국으로 돌려보냈고 현재까지 아들과 함께 베이징 왕징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는 식당을 개업하기도 하는 등 여러 차례 창업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현재는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7080밴드’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으며, 한 음악학원의 부원장 직을 맡고 있다. ‘7980밴드’는 40세 이상의 멤버들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음악에 대한 열정 때문인지 50대인 그 역시 동년배보다는 젊어 보이는 외모를 갖고 있다. 그는 창업 실패 경험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고,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그의 수입은 돈이 잘 벌릴 때에는 한 달에 1만 위안(약 180만 원)을 넘게 벌기도 하지만 요즘은 그보다 적은 8000위안 정도를 번다. 그는 “올해 8월 딸 아이가 수도사범대학에 입학하게 되어서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라고 말해 더 많은 수강생이 학원을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그는 “딸은 공부를 아주 잘하고 아들은 칭화(清华)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며 중국어능력시험에서 최고 등급을 받았다. 더 벌어서 자식들에게 생활비와 용돈을 더 많이 주고 싶다. 두 아이에게 용돈과 생활비를 줘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아이들이 잘 지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2002년 7월 31일 한국의 한 대형 신용보험회사의 중국 대표로서 처음 중국 베이징에 왔다는 임영호 씨 역시 점점 높아지는 물가에 베이징에서 생활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전했다. 그는 “처음 왔을 때만해도 왕징은 썰렁했고, 고층빌딩 한, 두 개 정도만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거의 10년에 달하는 자신의 베이징 생활을 “너무 화려했다”라고 표현했다.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집은 베이징에서 일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구입한 것인데 당시 1평방미터에 6000여 위안을 주고 구입했다. 그리고 이후 그의 집은 가격이 최고 평방미터당 3만 위안 이상에 달했다.
 
중국에서 10년 가까이 생활했지만 다른 한국인 상인들처럼 중국어가 그리 유창하지 않은 50대의 임영호 씨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의 생활에 대해서 매우 간단한 중국어로 “어려웠다”라고 표현했다. 금융위기 당시 왕징에 거주하던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귀국’ 바람이 불었는데, 임영호 씨는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해 위기를 넘겼다.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임영호 씨는 광고회사를 운영했고, 현재는 중관춘(中关村)의 한 작은 기업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기까지 하다. 기업가인 동시에 ‘재중 한국인회’ 고문인 그는 중국에서 생활하는 80만 명의 한국인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그는 “중국을 여행하고, 중국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 대부분이 중국을 좋아한다. 현재 발전하고 있는 중국에는 더 많은 창업 기회가 있다. 특히 식당, 미용, 마트 등의 업종에서 한국인 상인은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는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택시를 주로 타고 다녔는데, 2008년 올림픽 이후에는 버스를 자주 타며 더욱 실질적으로 더욱 가까이에서 베이징을 알아가고 있다고 했다.

임영호 씨 역시 ‘자식 자랑’을 잊지 않았다. 그는 “아들이 이미 일본 최대의 헤드헌터 회사의 베이징 회사에서 전망 있는 직종에서 일을 하고 있다. 아들이 베이징에서 잘 생활하고 있어서 매우 기쁘다”라고 전했다.

文章来源: 中国网
关键词:[ 베이징의 한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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