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의 해'에 중일한 호랑이를 말하다

인민화보  |   송고시간:2022-02-04 14:54: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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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일은 중국 춘제(春節, 음력 설)로 신축년 '소의 해'에서 임인년 '호랑이의 해'로 진입한다. 중국의 12간지는 예부터 한국과 일본 양국에 전파됐고 중일한 3국의 호랑이 문화는 역사적 연원이 깊고 문화적 공통성이 있다.

 

中의 호랑이 문화, '산수지군(山獸之君)' 패기와 신격화

 

중국의 호랑이 문화는 일찍 상(商)나라 때부터 광범위하게 유행됐다. 은허(殷墟) 유적에서 호랑이 형태의 기물이 다량 출토됐다. 그 중 부호묘(婦好墓)에서 출토된 옥호랑이 8점이 가장 정교하고 아름답다. 상주(商周) 청동기에는 '호식인(虎食人)' 도안과 부조(浮雕)가 자주 나타나 상고시대 중국인이 호랑이를 숭배해 호랑이를 인간과 신 사이의 소통의 매개나 채널로 여겼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이뿐 아니라 호랑이는 용맹해 권력의 상징으로도 여겨진다. <시경·상무(詩經·常武)>에는 '왕분궐무, 여진여노, 진궐호신, 함여효호(王奮厥武,如震如怒,進厥虎臣,阚如虓虎)'라고 하면서 군사를 맹호에 비교해 군대의 위력을 드러냈다. 동한(東漢)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호랑이를 '짐승의 왕'이라고 했다. 그래서 춘추전국시대부터 중국 제왕은 군사 인신(印信)을 호랑이 모양으로 새겨 '호부(虎符)'라고 했다. 평소 '호부'는 하나를 반으로 갈라 제왕과 장군이 하나씩 갖고 병사를 일으킬 때 둘을 하나로 합쳤다. 이 밖에 고대 중국에서는 사신(四神) 문화가 많이 유행했고 백호는 서쪽의 방위신이자 '전쟁의 신'으로 추앙됐다. 주 문왕은 꿈에서 날개가 있는 호랑이를 보고 후에 강상(姜尚)을 신하로 얻어 주나라의 기틀을 다져 '여호첨익(如虎添翼)'이라는 말이 생겼다.

 

호랑이는 고대 중국에서 위풍당당한 이미지 외에 귀신을 쫓고 상서로움을 상징해 신격화됐다. 예를 들어 <산해경(山海經)>에서 호랑이는 악귀를 먹는 전설이 있고 도교 창시자인 장도릉(張道陵)과 재물의 신 조공명(趙公明)이 타는 것은 흑호랑이였다. 중국 민간에서는 아기의 건강한 성장을 바라며 호랑이 머리 모양 모자를 씌우고 호랑이 머리 모양 신발을 신겼다.

 

한국 호랑이 문화, '산신(山神)'으로 상징되는 영기와 미화


한국에서 호랑이 문화는 비교적 일찍 시작됐다. <후한서·동이열전(後漢書·東夷列傳)>에 따르면 조선반도(한반도)의 많은 부락이 '호랑이를 신으로 삼아 제사를 올렸고' 중국과 마찬가지로 호랑이를 숭배했으며 민간에선 호랑이를 산신으로 여겼다. 단군신화에도 호랑이가 나타나기 때문에 호랑이가 초기 조선반도 부락의 토템 중 하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조선반도에는 숲이 많아 호랑이가 살기 적합해 사료에는 호랑이가 마을에 들어오고, 궁궐에 들어와 사람이 다쳤다는 기록이 많이 있다. 따라서 호랑이는 백성의 생활을 위협하는 맹수이자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다. <고려사(高麗史)>에는 '호랑이는 맹수라 길하지 않고, 전쟁을 주관하니 위험한 일이 있을 수 있다', '호랑이가 들어와 나라가 공황 상태'이니 국왕이 나라를 보우해달라고 신께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태조는 호랑이 사냥의 명수였고, 관아에서는 호랑이에 대응하기 위해 '착호갑사(捉虎甲士)'라는 관직을 두고 호랑이를 5마리 이상 잡으면 승진시켜주었다. 이로써 호랑이 가죽, 호랑이 뼈 등이 고대 한국의 토산품이 됐다. 고려 기병은 호랑이 가죽으로 활집을 만들었고, 일본 대마도는 조선에 호랑이 가죽을 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다.

 

중국의 영향으로 옛날 한국에서도 호랑이를 권력의 상징으로 여겼다. 고려와 조선은 호부를 사용해 병력을 움직였다. 고려군에는 용호군(龍虎軍), 신호위(神虎衛)가 있었고, 조선군에는 호분위(虎賁衛)가 있었다. 고려와 조선 시대 국왕이 순행을 나갈 때 의장으로 백호기를 사용했고 국왕의 무덤에 석호(石虎)를 놓았다. 조선의 1, 2품 무관의 관복 흉배에 호표를 사용했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 세조는 야심만만하다 하여 세간에서 '대호(大虎)'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이로써 현실 속 흉포한 '호랑이'와 문화적 의미에서의 '호랑이'가 분리돼 호랑이 이미지가 미화되고 추앙받게 됐다. 예를 들어 한국 무속에서는 호랑이를 형상화한 부적이 있고 세화(歲畫)에도 호랑이를 그려 귀신을 쫓았다.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까치와 귀신을 쫓는 호랑이를 같이 그린 '작호도(鵲虎圖)'는 한국의 호랑이 문화를 대표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화가 김홍도의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와 <죽하맹호도(竹下猛虎圖)>에도 독특한 호랑이 형상이 나타난다. 또한 '김현감호(金現感虎)'라는 전설은 호랑이가 신라인 김현을 사랑해 자기를 희생했다는 내용으로 호랑이 이미지에 온정을 더했다.

 

현대 한국인은 호랑이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졌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마스코트에 호랑이가 있고 심지어 조선반도 지도를 호랑이 형태로 그리는 사람도 있다. 많은 한국인이 꿈에 호랑이가 나타나면 승리와 성공을 예시한다고 믿는다. 이는 중국의 <주공해몽(周公解夢)>의 관점과 비슷해 중한 양국 국민의 호랑이 꿈에 대한 바람이 '이상동몽(異床同夢)'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호랑이 문화, '영웅의 호적수'라는 호기와 귀여움화


일본의 호랑이 문화는 상대적으로 늦게 시작됐다. 고고학에서 일본 열도에 호랑이가 있었다는 흔적을 발견했지만 조몬시대 본토에는 이미 호랑이가 멸종됐다. 당시는 문자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은 일본에 호랑이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일본 문헌에서 호랑이에 관한 기록이 최초로 나온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로, 언급된 3곳 모두 조선반도와 관계가 있다. 이는 동아시아 대륙에서 온 호랑이 문화가 조선반도를 통해 일본으로 유입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뜻한다. 기록 연대가 가장 이른(AD 545년) 것은 일본 지방 호족 카시와데 노하스히(膳巴提便)가 백제에 가는 도중에 호랑이를 제압한 이야기다. 진실성은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당시 일본인이 호랑이의 난폭한 특징을 알고 있었고 호랑이를 제압해 용맹하다는 칭호를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일본인은 호랑이를 제압한 이야기를 즐겨 말하며 자신들이 좋아하는 영웅에게 덧붙였다.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가신들과 함께 호랑이를 잡았다는 이야기와 에도시대 정성공(鄭成功)을 원형으로 한 인형극 닌교조루리(人形淨琉璃)의 명작 <고쿠센야갓센(國姓爺合戰)>의 주인공 '와토나이(和藤內)'가 호랑이를 잡는 이야기가 그 예다.

 

호랑이는 영웅의 적수라서 자연스럽게 악귀의 역할이다. 일본의 전통 '악귀'의 전형적인 이미지 중 하나는 머리에 뿔이 두 개고 몸에는 호랑이 가죽 치마를 입는 것이다. 호랑이의 사나운 경지가 호랑이 가죽 치마를 통해 악귀에 덧씌워져 모모타로(桃太郎) 등 전통 민간 고사의 악귀 외모가 이렇게 묘사됐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중국의 <서유기> 속 인물인 '손오공'이 있다. 손오공도 호랑이 가죽 치마를 입고 있고 원작의 '털 난 얼굴에 툭 튀어나온 입'의 외모에서 '요괴의 왕'의 사나움이 드러난다. 이 밖에 호랑이 문화는 불교를 통해 중국에서 조선반도와 일본으로 전해졌고 '사신사호(舍身飼虎)' 등 이야기도 3국에 널리 전파됐다. 재미있는 점은 <일본서기>에 '안작득지(鞍作得志)'라는 승려가 호랑이를 친구로 삼아 호랑이가 신비한 법술을 많이 알려주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 한국과 마찬가지로 고대 일본인도 호랑이가 귀신을 쫓는다고 믿었다. 때문에 위로는 천황 귀족, 아래로는 일반 백성의 숭배를 받았다. 호랑이 가죽은 영력과 질병 치료 효과가 있다고 여겨져 외국 무역 상품과 외교 사절의 선물 명단에 오르곤 했다. 호랑이 가죽은 비싸 대다수 평민은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호랑이를 모방한 완구를 통해 무병과 무탈을 빌었다.

 

그러나 한국, 중국과 다른 점은 고대 일본인은 현실에서 호랑이의 '진면목'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인 대부분은 중국과 조선반도에서 온 그림을 통해 호랑이의 모습을 보거나 고양이에서 호랑이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을 뿐이었다. 에도시대 유행한 민간 백과사전인 <와칸산사이주에(和漢三才圖會)>에 '호랑이는 짐승의 왕이라, 고양이를 닮았으나 소처럼 크다'고 기록돼 있다. 때문에 고대 일본 화가 중에는 호랑이를 짐승의 왕의 사나움을 줄고 큰 고양이 같은 귀여움이 더해 그려 맹호(猛虎)가 귀여운 맹호(萌虎)가 되기도 했다.

 

호랑이 문화는 중일한 3국 민속 신앙에 깊이 침투해 융합됐다. 호랑이의 사납고 난폭한 이미지와 귀신을 쫓고 상서롭다는 문화 요소는 짐짓 모순돼 보이지만 3국에 다 있고, 1000여 년 동안의 문화 교류 속에서 엇갈리고 발전하면서 독특한 문화 현상을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