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산동
칭다오는 본래 즉묵현(卽墨縣)에 속한 보잘것없는 어촌이었으나, 청대(1644~1911)에 칭다오커우[靑島口]라는 세관이 세워지면서 대규모 정크 무역이 발전했다. 1880년대 북양함대(北洋艦隊)를 창설하면서 중국 정부는 칭다오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곳에 소규모 해군 보급기지와 요새를 설치했다. 1897년 이 지역에 눈독을 들여온 독일 정부는 자국 선교사 피살사건을 구실로 군대를 급파해 칭다오를 점령했다. 1898년에는 중국 정부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요구했고, 산둥의 철도경영권과 광산채굴권을 포함해 자오저우 만과 그 주변지역을 99년 동안 조차해주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에 따라 칭다오는 1899년 자유항으로 선포되었고, 근대식 항구시설도 들어섰다. 또한 지난[濟南]까지 이어지는 철도도 놓였다. 칭다오는 유럽풍의 근대적 도시로 설계되었으며, 여러 공장들도 들어섰다. 멀리 남쪽으로 장쑤 성[江蘇省]에 있는 새 항구 롄윈 항[連雲港]까지의 해안무역을 관장하기 위해 제국해관(帝國海關) 지부가 칭다오에 세워졌다. 1914년 일본이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한 것도 무엇보다 칭다오를 확보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1914년 11월 일본은 이 항구를 봉쇄한 뒤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1922년 워싱턴 회의의 결과에 따라 중국에 반환할 때까지 이곳은 일본에 점령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 기간 동안 칭다오뿐만 아니라 산둥 성 내지에도 강력한 거점을 구축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