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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새로운 기점과 새로운 여정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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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china.org.cn | 송고시간: 2018-07-12 10:28:28

빙하가 녹는 듯, 씨앗이 싹을 틔우는 듯 했다. 1978년,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의 막이 내린 후 중국 사회에 축적된 개혁의 힘은 봄날 차오르는 조수처럼 용솟음쳤다. 시대의 부름에 응해 인민의 기대를 담은 개혁개방의 거센 물결이 산을 밀어 치우고 바다를 뒤집어 엎는 기세로 사상을 옭아맨 속박에서 벗어나 구시대의 낡은 체제적 장애를 뚫고 중국을 위해 새로운 발전의 길, 개방의 길, 부강의 길을 열었다.

 

한 소상인과 19가구의 촌민 이야기


큰 시대를 만나면 평범한 인물도 역사의 파도를 탈 수 있다. 안후이(安徽) 우후(蕪湖)의 소상인 녠광주(年廣久)는 해바라기씨(과즈∙瓜子)를 볶아 파는 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가 파는 해바라기씨는 양도 부족하지 않았고, 품질도 좋았는데 이문이 아주 박해 사람들은 그를 바보를 뜻하는 ‘사즈(傻子)’라고 불렀다. 근면성실과 신용을 바탕으로 한 장사가 갈수록 번창하면서 1979년 그는 ‘사즈과즈(傻子瓜子)’라는 상표를 등록했다. 작업장도 차츰 발전해 약100명의 직원을 두게 되면서 그는 당시 사회를 풍미하는 유명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는 직원을 고용하는 것이 ‘착취’로 여겨지던 때라 그는 조사를 받고 수감되었다. 다행히 그의 운명이 이 시기 큰 시대의 물결과 부딪치면서 위인은 극적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은 연설 중 세 번이나 ‘사즈과즈’를 언급해 자영업자의 직원 고용 문제를 해결해주었을 뿐 아니라 녠광주의 운명도 바꾸었다. 2008년 그는 중국 개혁개방 30년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거의 동시에 안후이 펑양(鳳陽) 샤오강(小崗)촌 주민들이 매 가정에 전답을 분배한 계약이 당과 정부의 이목을 끌었다. 40년 전 샤오강촌은 계속된 흉작으로 먹을 게 없어서 대다수 주민들이 구걸을 하여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1978년 11월 24일, 마을의 18가구가 전답을 분배하는 계약을 했다. 당시 전답을 분배하는 것은 위법행위에 속했기 때문에 마을주민들은 비밀리에 ‘생사계약’을 맺고 손도장을 찍었다. 그들은 각 가구에 전답을 분배해 가구마다 연간 바쳐야 하는 공량(公糧∙식량으로 내는 현물세)을 완수해 더 이상 국가에 손을 벌리지 않기로 약속했다. 촌간부가 이로 인해 수감되어 사형을 당했기 때문에 모두가 그들의 아이들을 18세까지 부양하기로 약속했다. 1년 후 샤오강촌은 기본 생계에 필요한 최저 수입 한계선을 뛰어넘으면서 주민들은 더 이상 굶주리지 않게 되었고 외지에 구걸을 다닐 필요도 없게 되었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 초기 몇 번의 연설에서 샤오강촌의 전답을 가구에 분배한 예를 언급하면서 틀린 글자로 장황하게 써 놓은 소박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생사계약’이 중국 농촌개혁의 진귀한 문화재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당시 녠광주와 샤오강촌의 주민들이 추구한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현실적인 목표, 즉 배불리 먹고 잘 사는 것이다. 그들은 이 작은 목표가 많은 인민대중의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추구와 열망을 대표하고, 공산당원의 노력과 분투의 방향과 일치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기회가 맞았고 인연이 있었든지 그들은 시대의 흐름을 탔고, 역사도 이들 평범한 노동자들을 길이길이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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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中国网
키 워드:[개혁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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