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민항일전쟁, 그 잊을 수 없는 역사
멍자오위는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백단대전(百團大戰), 기중 5·1 반(反)소탕, 바오난(保南)전투, 타이위안(太原)전투 등에 참전했다. 그는 전투에 관한 이야기는 삼일 밤낮을 꼬박 새워 말해도 부족하다고 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지금 젊은이들은 믿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방한화는 구경도 못했어요. 신발은 모두 사람들이 만들어 준 짚신 아니면 헝겊신이었죠. 치수가 맞지 않을 때는 끈으로 신발 양쪽 끝을 묶어 억지로 맞춰 신었어요. 겨울에 보초를 설 땐 외투 하나를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입었습니다. 잠을 잘 땐, 돌발상황 발생 시 발을 바로 땅에 딛고 출동하기 위해 머리를 안쪽으로 하고 잤죠.”
당시 일본군은 팔로군(八路軍)의 물자 공급을 끊을 목적으로 현재의 베이징인 베이핑(北平)의 주요 하류에 있는 댐을 폭파했고, 많은 농지가 물에 잠기는 바람에 마을 주민들이 먹을 식량이 없었다. 멍자오위는 웃으며 “전 거의 모든 종류의 나뭇잎을 먹어봤어요. 그때는 소금도 없어서 그냥 생나뭇잎을 뜯어다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는데, 그때 입안에 퍼지던 백양나뭇잎의 지독한 맛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아주 구역질이 납니다.”
등에 남은 영원한 상처
1940년 1월 초, 새해는 지났지만 음력 설은 아직 오지 않은 때였다. 멍자오위가 속해 있던 27연대는 완핑다싱(宛平大興) 이남, 안츠(安次) 서북과 융칭(永淸) 이북 지역으로 출동해 지방 간부와 협조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개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북풍이 살벌하게 불어대는 영하 10도 이하의 엄동설한 속에서 며칠간 계속된 행군 끝에 마침내 연대는 융딩(永定)강 이북에 도착했다. 1937년 베이핑이 함락된 이후 이 지역 전체는 2년 새 일본 왜놈과 매국노들에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힘없는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나라 재정도 바닥이 났다. “어떤 이들은 우리를 반기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울며 고통을 호소했지요. 음력 설은 다가오는데 적들에게 봉쇄되어 있어 부대 내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2월 7일, 밤 27연대는 적의 거점을 습격해 일부 물자를 획득한 후 이를 포대 자루에 넣어 돌아와서는 자축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적에게 위치가 노출되어 정월 초삼일 이른 아침 일본군 300여 명으로 구성된 ‘소탕 부대’가 진격해왔다. 전투 중 멍자오위는 적의 포탄에 부상했다. “당시 등 쪽이 너무 아파 손으로 만져보니 손이 온통 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요오드팅크, 빨간약 같은 것 말고는 다른 치료약도 없었어요. 행군하는 길에 마을 주민 집에 가서 소금을 좀 달라고 해서는 물에 넣고 끓인 뒤 식혀 소독하고 약을 발랐습니다. 거즈 두 개를 번갈아 가며 빨아서 사용했는데, 이렇게 부상한 채로 전투를 치르다 보니 20여 일이 지나서야 좋아졌습니다.” 그는 등 쪽에 난 5cm 가량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文章来源: 人民画报
关键词:[ 중국인민항일전쟁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