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민항일전쟁, 그 잊을 수 없는 역사
1938년 5월 여우광차이는 집에서 긁어모은 은화 여섯 닢을 주머니에 넣고 어머니가 새로 지어주신 헝겊신을 신은 채 그 길로 입대했다. “어머니가 이별하던 날의 이른 아침 우리 두 모자는 서로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이 가시는 날까지 함께 있길 바라셨지만, 내가 이렇게 가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여우광차이는 혼자 쉬저우(徐州)를 향해 걸었다. 타이얼좡 대첩도 쉬저우의 함락 운명을 바꾸진 못했다. 쉬저우시에 다다랐을 때 그는 동북에서 서남 쪽으로 퇴각하는 부대를 발견하고 부대에 섞여 이들을 따라 행진하기 시작했다. 극민당군이었다. “황혼이 지나 전장에서 퇴각하는 부대였는데, 빠르게 뛰다가 천천히 뛰다가 했습니다. 총소리가 나지 않을 때만 천천히 행진을 했죠. 걸으면서도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면 아직도 걷고 있었어요.”
룽하이(隴海)와 진푸(津浦, 톈진-푸커우)철길을 지나 쉬저우 전장을 건너기까지 수 천 킬로를 걸은 끝에 마침내 오전구 사령부(五戰區司令部)가 소재한 허난(河南)성 황촨(潢川)현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정식으로 항일전쟁의 신병이 되었다.
여우광차이에게 군 간부를 양성하는 학교인 황포(黃埔)군관학교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당시 항전에는 예비역량이 필요했다. 교육수준은 그리 높지않은 그였지만 일단 ‘황촨 청년간부 훈련단’에 참가했다. 거기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그는 황포군관학교 우한(武漢) 분교에 파격적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그는 군관학교에서 연병장 제식훈련을 받고 <보병 훈련 교본>, <사격 교범> 등의 과정을 학습했다. 또 손중산(孫中山)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연구하고 야외 훈련, 가상 전투 등의 훈련을 받았다. 세월이 지나 여우광차이는 어느덧 유생에서 진정한 용사로 거듭나게 되었다.
1939년 가을, 여우광차이는 황포군관학교 제 16 기 졸업생이 되었다. 그러나 바로 전장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그는 단정한 품행과 우수한 성적을 인정받아 연대에 남아서 근무를 하게되었다. 1년 뒤, 그가 소속된 연대가 해산되었다. 1941년 그는 중국군 54군단으로, 또 얼마 뒤에는 50사단 150연대 2대대 5중대의 상위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文章来源: 人民画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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