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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민항일전쟁, 그 잊을 수 없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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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china.org.cn | 时间: 2015-08-21 13:33:32

  여우광차이는 통신병 한 명에게 저우융의 시신을 지키도록 지시하고 다른 통신병 한 명을 데리고 계속 앞으로 전진하여 최전선에 도착했다. 이때 진지에서는 이미 육탄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바심이 나서 큰 목소리로 ‘저우융, 돌격 신호를 보내게! 돌격!’을 외쳤으나 아무 신호도 없었고, 그 순간 멍해졌습니다. 그가 이미 전사했다는 것을 깜박한 것이죠. 급히 제3 소대 진격을 명령했고 모든 중대가 사력을 다해 적을 공격했습니다. 한 차례 교전 끝에 적은 드디어 무너졌습니다. 온 땅이 시체로 가득했고 도망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부대는 이들을 이라와디 강변까지 추격했다. 이날 오후 4시, 여우광차이와 전우들은 시포를 점령하였다. 이 전쟁으로 인한 특수중대 사상자는 모두 25명이었다.
 
 
  미얀마에서 돌아온 후 여우광차이는 어렵게 항일전쟁이 승리로 끝났으니 이제야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해방전쟁(국공전쟁)의 총성이 다시 울렸다. 그는 할 수 없이 다시 부대를 따라 랴오선(遼沈)전투에 참전했다. 그의 부대는 해방군에 의해 해산됐고, 귀순 후 재교육 및 노동교화를 받은 그는 다시 문화대혁명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1978년 이후 세상이 안정되자 중학교 영어선생님이 된 그는 지역 정치협상회의 위원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곡절 많았던 인생, 무수한 시련과 고난은 이제 여우광차이에게 지나간 과거의 일이 되었다. 지금 그에게는 세 가지 바람이 있다. 첫째는 9월 3일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거행되는 열병식에 참가하는 일이다. 둘째는 살아 생전에 자신의 저서 <나, 공화국, 함께 짊어진 운명>을 출판하는 일,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중국 대륙과 대만이 하루빨리 통일을 실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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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章来源: 人民画报
关键词:[ 중국인민항일전쟁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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